안규철은 일상의 사물과 언어를 주요 매체로 현실비판적 시각의 개념미술을 보여준다. 평범한 사물을 관찰하고 사물의 기능과 성격을 전복시키기도 하고 그 사물을 다른 맥락 속에 옮겨 놓아서 우리가 간과하는 일상의 이면을 환기시킨다. 절제된 형태의 사물과 지적인 사유를 결합하여 손수 만드는 수공의 장인정신으로 일관한 그의 작업에서 사회 문제를 비판적으로 보고 문제를 지적하는 미술 고유의 기능을 강조한다.
구두 세 족의 앞코와 뒷굽을 붙여 놓고 두 켤레의 구두로 표현한 <3분의 2 사회>(1992)는 집단과 개인의 긴장관계를 다룬 작업이다,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는 개인 사이의 갈등, 충돌, 모순을 이야기하는데 최소 단위로 ‘셋’이라는 숫자를 상정했다. 하나로서 충분하지 못한 각각의 존재는 개인만으로 충분하지 못한 인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들의 조합과 단결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권력의 형태는 기형적일 수 밖에 없다.
최정화는 싸구려 대중문화를 전시장에 옮겨 놓는 작업을 한다. 플라스틱 소쿠리, 바가지, 돼지 저금통, 전구, 조화 등의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값싸고 시시한 사물들을 작품에 도입하여 대량 소비 사회와 자본주의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또한 '고급미술'이라는 삶과 유리된 영역을 비틀어보는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천박하다고 여겼던 사물들을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재인식하도록 한다. 플라스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들의 일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다.
각종 음식 사진으로 내부를 채운 플라스틱 변기 커버들을 일렬로 세워놓은 <그럴듯한 깨달음>(1994)은 인간의 먹고 배설하는 순환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다. 기존 미술에 대한 비난과,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이나 집착에 대해 저돌적인 비판을 가한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미국 태생의 바이런 김의 <한점 부끄럼 없기를>(2000)은 작품의 제목을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차용했다. 한옥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으며 우연히 발견한 <서시>와 시인의 삶에 대한 감동을, 전통적인 한지 병풍 위에 먹색과 하늘색을 통해 각각 밤과 낮의 하늘을 표현했다. 작품 곳곳에 보이는 미완성된 부분은 요절한 시인의 짧은 생을 반영한다.
이 이미지는 일제의 강점 하에 정치적 현실을 초월적으로 그려낸 윤동주의 <서시>가 그려낸 하늘의 이미지이며 그것이 추상적 시각언어로 피부색, 어린 시절의 기억, 정치적 사건 같은 특정 주제를 그려낸 작가 자신의 방식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도, 결국에는 한국인일 수 밖에 없다는 자기고백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시리즈(1996-97)는 사진을 합성하여 현실 속 인물인 작가 자신의 얼굴과 허구 속 인물인 대중스타를 결합했다. 작가에 따르면 ‘스타가 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라는 대중의 욕망을 가장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연작이다. 영화 속 주인공으로 자신을 연출하며 나르시시즘과 자기 연민이 얽힌 드라마를 보여 주고 있다. 심각하고 엄숙하여야 할 미술은 싸구려 장르영화와 상업광고의 상투적인 장면으로 변환되고, 그 속에서 감독이자 주연인 작가는 고민과 절망을 조잡하게 위조한 사진을 희화적으로 선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일부러 거칠게 만든 합성사진 이미지들은 실상 세련되고 고상하지 못한 우리 현실을 그럴듯하게 재현하여 보여 주고 있다.
<남자는 괴로워>(1995)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인간 군상의 하나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명세 감독의 코미디 영화이다. 얼핏 보기에 단순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야유를 넘어서서 절망과 비애를 보여준다.
강홍구는 <나는 누구인가> 시리즈(1996-97)에 작가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고 합성했다. 작품 속에 작가의 얼굴을 넣어 희화화함으로써 표현이 매우 직접적이며 설득력이 느껴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좀더 쉽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게끔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욕망이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욕망이라는 사실까지 느낄 수 있도록 유인한다.
그의 작품은, 내용이 뚜렷하고 단순해서 겉으로는 쉽고 재미있게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냉소와 야유를 넘어 절망과 비애감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폭력적인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가득한 인간이나 가정에 대한 비판이 그려지고, 무력한 일상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모습도 보인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다.
김순기의 <숲> 시리즈(1998-99)는 아날로그적인 사진 작품인, 일명 ‘바보 사진’ 연작이다. 작가는 “나무 상자에 구멍을 뚫어 만든 핀홀 사진기로 하는 작업을 1986년부터 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함께 원시적인 것을 하는 것도 좋아해요. … 사진기를 열어 놓은 채 내 할 일을 하죠. 그러면 핀트도 안맞고 광선도 멋대로이고 내가 움직인 궤적이 남는 사진이 나옵니다. 신기술과 대조적이면서도 만나는 지점이 느껴지나요?”라고 2008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직접 제작한 핀홀 카메라를 이용해 얻은 사진은 일종의 우연의 일치인 셈인데 사진기에 구멍을 뚫어 오랫동안 고정시킨 것이다. 일상과 무위, 아무것도 안함은 우연, 언어유희, 패러독스 등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을 설명해준다. 불교사상 및 노장사상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언어유희, 그리고 삶과 예술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심층적으로 다루어 왔다.
김순기는 1973년 처음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이래 설치, 비디오, 멀티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사진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불교사상과 노장사상,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등에 관심을 두고 시간과 언어유희, 그리고 삶과 예술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심층적으로 다루어 왔다. 직접 제작한 핀홀 카메라를 이용해 얻은 사진은 일종의 우연의 일치인 셈인데 사진기에 구멍을 뚫어 오랫동안 고정시킨 것이다. 일상과 무위, 아무것도 안함은 우연, 언어유희, 패러독스 등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한 개념을 설명해준다.
김순기의 <숲> 시리즈(1998-99)는 아날로그적인 사진 작품인, 일명 ‘바보 사진’ 연작이다. 작가는 “나무 상자에 구멍을 뚫어 만든 핀홀 사진기로 하는 작업을 1986년부터 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함께 원시적인 것을 하는 것도 좋아해요. … 사진기를 열어 놓은 채 내 할 일을 하죠. 그러면 핀트도 안맞고 광선도 멋대로이고 내가 움직인 궤적이 남는 사진이 나옵니다. 신기술과 대조적이면서도 만나는 지점이 느껴지나요?”라고 2008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이불의 <사이보그> 시리즈(1998)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인 사이보그 형태가 과장된 비례와 풍만한 몸매, 유백색의 피부를 지닌 성적 매력이 극대화된 미래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런 형태를, 일본 아니메나 망가, 혹은
<비너스의 탄생>(1485년경), <올랭피아>(1863)와 같은 미술사 속 여성 이미지의 원형에서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이보그에 투영되는 여성성은 고급문화부터 대중문화에 이르는 문화적 통로를 통해 만들어지는 남성 지배나 남성 우위의 가치관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새삼 강조되고 기형화된 신체는 왜곡된 남성의 시선을 고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이보그>의 초기재료인 실리콘이 여성들의 성형수술을 위한 인체 보형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이상적인 몸매에 대한 여성의 열망이나 이를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머리와 한쪽 팔다리가 없이 허공에 매달린
<사이보그>의 모습은, 인체를 보완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열어줄 것 처럼 보이는 테크놀로지의 완벽성이라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서영의 <전망대>(1999)는 작가가 친구에게 받은 엽서의 한 면에 인쇄되어 있던 사진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 엽서에는 북유럽 어딘가의 70년대식 수영장 사진이 담겨 있었는데 그 사진의 한쪽 구석에 아주 작은 크기의 전망대의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제작 과정에서 전망대의 크기가 실제 어떤 크기로 눈 앞에 재현될 지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고도 어려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크기란 이미지로서의 전망대를 눈앞 어디까지 끌어낼지를 결정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이 조각의 독자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조각의 제목은 전망대이지만 전망대의 기능은 전혀 지니지 못하고 있다. 얼핏 보면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전망하는 기능을 보유한 건축 조각물로 보이지만 실은 그리 작지도 그리 크지도 않은 애매한 크기이며 무언가를 높이 보거나 멀리 보는 전망대로서의 기능은 충족시키지 못한다. 작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이미지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그 안에서 연상되는 단어와 언어의 본래의 기능과 의미에서 벗어나 일반적이고 익숙한 사고체계에 의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흐트러뜨리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정서영은 <꽃>(1999)이 만들어진 기원을 도시의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꽃집 간판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거리의 간판들 중 별로 크지 않아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꽃이라는 글자를 간단하게, 꽉 차게 그리고 대부분 붉은색으로 쓴 네모난 종류의 것이다. 그 간판을 보면 누군가가 느닷없이 내 얼굴 정면에 대고 ‘꽃’이라고 명확하게 발음해 놓고는 획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 라고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작가의 글에서 밝혔다. 정서영의 <꽃>은 일반론적인 꽃의 이미지가 아니다. ‘꽃’이란 제목을 접하지 않는다면 꽃인지 알아보기 힘들기도 하다.
정서영의 작품의 제목이 불러 일으키는 시각적 연상작용은 관객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세상의 체계에 대해 반문을 던지는 작가의 작업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꽃’이라는 단어는 작가가 직면한 사회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당시 사회에서 흔하게 보이던 꽃이라고 단순하게 명시된 글자를 맞닥뜨리며 느낀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사물을 통해 사회가 끊임없이 구축하는 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드러낸다. 사물을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을 사유하고 조각을 둘러싼 관계 간의 긴장감과 균형감, 그리고 리듬감의 영역을 탐구한다.